발해와 신라의 외교 전략 비교: 당나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7세기 중후반부터 10세기 초까지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양분한 발해와 신라는 모두 중국 당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국가는 각자의 지리적 조건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기반을 둔 국가로, 당과의 친화적 관계를 중시하며 동맹 중심의 외교를 펼쳤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자주성을 강조하며 때로는 대립적, 때로는 유연한 외교를 수행했다. 본 글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당나라와 맺은 외교관계의 구조와 전략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통해 두 국가의 국제정치적 성격을 입체적으로 고찰한다.


신라의 외교 전략: 친당적 실리 외교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당과의 충돌을 봉합하고,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실리 중심의 외교를 이어갔다. 당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외교문서와 조공 체계를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방식이었다. 또한 당과의 교류를 통해 문물 수용과 제도 정비를 강화하였고, 유학생과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라는 스스로를 당과의 질서 속에서 안정된 동아시아 질서의 일원으로 포지셔닝하였다.

발해의 외교 전략: 자주적 교섭과 전략적 탄력성

발해는 698년 건국 이후, 초창기에는 당과의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무왕 이후 점차 사신을 파견하며 외교적 통로를 열었고, 문왕 때에는 '고려의 후예'임을 내세우면서도 당에 대한 조공과 외교 사절을 지속하였다. 이는 자주성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이었다. 발해는 일본, 돌궐, 거란 등 다른 국가와의 다자외교를 통해 당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추었다.

외교 관계에서의 형식과 실질 차이

신라는 명확한 사대 체제 내에 있었고, 국왕은 당의 책봉을 받으며 '신라왕'으로 불렸다. 반면 발해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사신을 파견할 때도 ‘국서’를 자주적으로 작성하였다. 당은 발해 국왕을 ‘발해군왕’이라 낮춰 부르며 그 위상을 제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발해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고 교역과 문화 교류를 지속하였다.

표: 발해와 신라의 대당 외교 비교

항목 신라 발해
외교 관계 성격 사대적 우호 외교 자주적 교섭 외교
사신 파견 정기적 조공 사절 파견 정기적·전략적 파견
왕호 사용 당의 책봉에 따른 왕호 수용 독자적 연호 및 국서 작성
다자 외교 여부 당 중심 단일 외교 일본·돌궐 등과 다자 외교

결론: 외교전략 속 국가 정체성의 투영

발해와 신라는 모두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나름의 생존과 성장을 모색한 국가였다. 신라는 안정과 제도적 수용을 통해 체제 내 실리를 확보했고, 발해는 독립적 외교를 통해 자주성을 표방하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 같은 외교 전략의 차이는 양국의 국가 정체성과 외부 환경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며, 현대 국제정치학에서도 충분히 참고할 수 있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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